문 화 재 명 : 금성단 유 형 : 경상북도 기념물 제 93호 소 재 지 : 경북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 70번지 시 대 : 조선시대
금성단은 경상북도 기념물 제9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조선 세조때 단종임금의 복위(復位)를 도모하다가 무참히 화를 입은 금성대군(錦城大君:이름 瑜, 세종임금의 여섯째 아들, 단종의 숙부, 수양대군의 넷째동생)과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 및 그 일에 연루되어 순절한 의사들을 제사 드리는 곳이다.
조선 세조 원년(1455) 단종임금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수양대군일파는 금성대군에게 모반의 누명을 씌워 삭령(朔寧)으로 유배시켰다가 다시 광주(廣州)로 이배(移配)시켰었다. 이듬해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등 사육신이 상왕 복위운동에 실패하여 참혹하게 희생되자 그 일에 연루되었다 하여 금성대군은 다시 이곳 순흥으로 이배,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금성대군은 당시 순흥부사 이보흠과 의기가 통하여 단종 복위를 위한 격문을 짓게 하여 은밀히 사방으로 보내어 의사나 협객들을 순흥 고을로 모여들게 하였다. 군비를 모으고, 무기를 장만하고, 군사를 조련하여 영월에 유배되어 있던 단종 임금 복위를 꾀하는 거사가 무르익어 가던 세조 3년(1457) 가을 어느날 밀의를 엿들은 순흥부의 한 관노의 밀고에 의하여 관군의 습격을 받은 순흥 고을은 온통 불더미에 피바다를 이루는 도륙을 당하면서 폐부(廢府)되고 말았다. 그로부터 200여년이 지난 숙종 9년(1683)에 순흥은 명예가 회복되고 이어 숙종 45년(1719) 고을사람 이기륭(李基隆)이 부사 이명희(李命熙)에게 알려 단소(壇所)를 설치하게 된 것이다.
금성단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영조 18년(1742) 경상감사 심성희(沈聖熙)의 소청에 의하였으며, 단소를 정비하고 중앙에 금성대군 위(位), 오른쪽편에 부사 이보흠 위(位), 왼편에 무명 의사 위(位)를 모시고 순의비(殉義碑)를 세웠다. 이곳에는 매년 봄, 가을 초정일(初丁日)에 향사를 지내오고 있다.